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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론(基督論:CHRISTOLOGY) 그리스도

여주&토야 2007. 12. 5. 23:09


창골산로.jpg 기독론(基督論:CHRISTOLOGY) 그리스도(1)

   
작성자:R.E 할로우
   
"그리스도론"이라 함은 글자 그대로 "그리스도에 대한 연구"를 뜻합니다. 물론 여기엔 그리스도께서 하셨고, 하시고 계시고, 또 장차 하시게 될 일도 들어갑니다. 그리스도는 성부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최고의 계시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시며, 대제사장이시며, 모본이시며,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모든 복의 근원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의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이전에 있던 모든 것은 그분을 가리켰고 현재와 장래의 모든 복은 그분께로부터 흘러나오며 갈보리에서 완성하신 사역을 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시기 전에 하신 일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둘째 위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항상 계신 분임을 이미 앞에서 보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시기 전에 하신 일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그분이 하신 창조와 보존의 사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는 한 가지 증거는 우주를 창조하신 그분의 능력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요1:4). 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모든 세계를 지으셨습니다(히1:2). 하나님은 우주를 지으셨을 뿐아니라 붙드시고 보존하십시다(느9:6).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시36:6).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17:28).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아들이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 것"과(히1:3)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서 있다"(골1:17)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계시하는 일을 하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드님은 사람이 되시기 오래 전에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의 모습으로, 어떤 때는 여호와의 천사로(천사론을 보라), 또 어떤 때는 불꽃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창12:7), 이삭(창26:2), 야곱(창35:9), 모세(출3:2), 이스라엘(레9:4), 여호수아(수5:13-15), 기드온(삿6:12), 마노아(삿13:11), 사무엘(삼상3:21), 다윗(대하3:1), 솔로몬(왕상9:2), 이사야(사6:1), 에스겔(겔1:28) 그리고 다니엘(단10:5)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성부나 성령께서 성자처럼 자기를 사람에게 나타내셨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자기를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십니까!

그리스도의 신성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이름에 의해, 그분이 여러 표현 속에서 하나님으로 불리움으로써(한 가지 예로 히1:8), 그러나 무엇보다 특별히 모든 반론을 잠재우는 그분의 속성에 의해서 신성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게 됩니다. 삼위일체론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령으로 더불어 동등하게 신성을 가지셨다는 증거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도 자연스럽게 입증된 셈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삼위의 한 위로서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되시는지를 이해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분은 "신인적"인 위이십니다. 즉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변한 하나님이 아니시며, 또 너무 훌륭한 사람이다보니까 하나님으로 되신 분도 아니며, 그분은 하나님이신 것과 똑같이 사람이시며 완전한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지니신 분(양쪽을 부분적으로 지니신 것이 아니고)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삼위의 한 분이신 우리 주님의 위를 놓고, 대부분의 이단들은 이 점에 있어서 인성이나 신성 어느 한 쪽으로 너무 지나치게 편중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초기 이단들은 예수님께서 마치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무슨 유령처럼 여겼다). 또 오늘날의 이단들은 그분이 진짜 하나님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쪽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의 참된 입장은 영국국교의 종교개조(宗敎箇條) 제2조에 훌륭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성자는 성부의 말씀이시며, 성부의 영속하는 독생자시며,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와 동일한 본체시요, 하나님께 복받은 동정녀의 복 중에서 사람의 형체를 입으셨다. 그러므로 온전하고도 완전한 두 가지 성품, 곧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연합되었고, 결코 나뉠 수 없으니 이 분이야말로 한 분 그리스도시며 참 하나님이시며 또한 참 사람이시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자들로부터 너무나도 많은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그분의 하나님으로서의 속성을 더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이 교리가 참된 것임을 강조하도록 하겠습니다.

영원하신 그리스도(요1:1). 그 말씀은 태초에 계셨습니다. 그분은 태초에 탄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태초"가 아무리 먼 과거에 놓일지라도 이 "말씀"은 그때도 여전히 계셨습니다. 요한복음1:14에서 우리는 이 "말씀"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분은 우주가 지음 받기 전에 아버지의 영광을 함께 누리셨습니다(요17:5). 빌2:6, 골1:17, 2:9, 히1:8과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으뜸이신 그리스도(골1:18). 성자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과 동등하십니다. 그분은 친히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습니다(막2:5,7).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예배를 받으셨습니다(마14:33, 눅24:52). 모든 무릎이 그분 앞에서 꿇게 될 것입니다(빌2:10).
전능하신 그리스도. 창세기1:1과 구약성경의 많은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셨다는 것을 봅니다. 신약에서는 만물을 지으신 분이 성자 하나님이라고 합니다(요1:3, 골1:16, 히1:10). 성자는 이 땅에 계실 때 자연을 다스리는 권세와(막4:39), 귀신들과(막5:8) 사망을 다스리는 권세도 가지고 계셨습니다(막5:41). 그리스도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롬1:4).

전지하신 그리스도(요16:30, 21:17). 그분은 사람의 생각을 아시며(마9:4), 멀리서도 아십니다(요1:48). 그분은 장래의 일도 아십니다(요6:64, 13:3).

무소부재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몸은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계십니다(엡1:20). 그러나 두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함께 계십니다(마18:20). 주님은 또한 그의 분부대로 온 천하에 다니는 모든 사람들과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28:19,20).

영원불변하시는 그리스도(히1:12). 성부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스스로 존재하시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의 아들도 그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큰 사건은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 곧 신인이 되신 사건입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셨던 것이 아니며, 그렇게 되실 수도 없었습니다. 그분의 놀라운 성품이 변한다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의로우신 그리스도(딤후4:8). 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은 아들 속에서도 똑같이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의를 사랑하시며 불의는 미워하십니다(히1:9). 지상에 거하실 때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사랑하셨지만 하나님께 반역한 그들의 죄는 미워하셨습니다. 모든 심판을 그 손에 위임받은 자로서(요5:22) 아들은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거룩하신 그리스도(눅1:35). 이 구절에서 우리 주님의 모친 마리아는,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지금 하늘에는 우리의 대제사장이 한 분 계십니다(히7:26). 예수님의 친구였던 사도 베드로는 그분을 거룩하신 자로 알아보았으며(행3:14), 귀신들린 원수도 그러했습니다(막1:24).

사랑이신 그리스도(요13:1). 땅에 계실 때 그분은 사람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막9:36). 그분은 교회를 사랑하셨고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셨습니다(엡5:25).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립니다(유21).

이상의 구절들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인품이 곧 그리스도의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 말의 뜻이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님과 닮았다고 하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식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해서도 안됩니다. 이 교재에 나와있는 모든 성경구절들(그리고 그 외 수 십개 더)을 기꺼이 대하는 사람은 누구나,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혹은 하나님의 한 아들)일 뿐 아니라 성자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고 있음을 반드시 깨달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구약의 여호와는 신약의 예수님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사야는 여호와가 오시기 전에 선구자가 미리 올 것을 예언했습니다(사40:3). 이것은 마태복음 3장에 적용이 됩니다. 백성들은 여호와를 시험하였는데(민21:6,7), 이분이 곧 그리스도임을 보게 됩니다(고전10:9). 그리스도는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으셨습니다(엡4:8). 이것은 시편68:18에서 예언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참 하나님 중의 참 하나님"이신 성부와 동등하시며 똑같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성

주 예수님은 죄의 성품을 빼고는 인간의 모든 특성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출생은(기적적인 잉태를 제외하고) 정상적인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심은 성령님에 의한 것이며(마1:20), 또 그 모친은 처녀였다고 주의 깊게 기술하고 있습니다(1:23). 눅1:31,35, 2:5-7,16, 21,28을 면밀히 상고해보십시오. 그분의 어린 시절도 일상적이었습니다. 그분은 질문을 하셨고, 그 부모에게 순종하셨으며,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눅2:40-52). 그리스도는 자원하셔서 인간의 한계를 겪으셨습니다. 즉 주리셨고(마4:2), 지치셨으며(요4:6), 목말라 하셨습니다(요19:28). 그분은 자기 육체의 필요를 채우고자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지신 능력을 사용하신 적이 단 한번도 없으셨습니다. 그분의 감정은 인간적이었습니다. 곧 사랑(막10:21), 분노(막3:5), 슬픔(눅13:34)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 번도 두려움을 보이신 적은 없습니다. 크게 위태로울 때조차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눅4:29,30, 요10:31,32). 그분의 죽으심은 사람의 죽음과 같았습니다만 차이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진맥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큰 소리로 외치시고 스스로 자기 영혼을 버리셨습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10:17,18). 인간의 죽음은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인간과 같은 삼중적인 구조를 지니고 계셨으며 이는 곧 그분의 혼(마26:38)과 그분의 영(눅23:46), 그리고 그분의 몸(요19:40)에 대해 우리가 읽는 바와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제외한 모든 중요한 점에 있어서 모든 사람과 똑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죄는 반역이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우리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롬1:28- 32, 3:23, 5:12). 하나님은 자기 성품과 모순되게 행하실 수 없으며 이점은 그리스도께서도 동일하십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진실로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요8:28,29). 그리스도의 원수들조차도 그분의 죄 없으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8:46 ). 빌라도는 말하기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겠노라"(요19:4,6)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친히 자기 아들을 인정하고 계심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가 저를 기뻐하노라"(마3:17, 17:5). 마침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완전한 사람으로 보셨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아무 죄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벧전2:22). 그분은 죄를 알지도 못하셨습니다(고후5:21). 그분 안에 전혀 죄가 있지 않았습니다(요일3:5).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시되 완전한 사람이셨음을 보았습니다. 이 진리를 강조하는 이유는 오직 사람만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만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사람이신 분이 계셔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중보가 되어주셔야 했습니다(딤전2:5). 오직 죄 없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죽을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에게 한 가지 죄라도 있었다면 그분은 자기 죄를 위해 죽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어린양은 완전한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완벽하신 분이고 또한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죄를 짓지 않으셨을 뿐더러 자신이 곧 하나님이셨기에 죄를 지으실 수도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흠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두 가지 성품, 곧 신성과 인성을 가지셨음을 보았습니다. 그분의 신성은 영원 전부터 가지고 계시던 성품이었습니다만, 인성은 처녀에게서 나심으로써 취하신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살과 피와 그것에 필요한 모든 것을 취하신 것을 일컬어 "성육신"이라고 하며, 이는 단순히 "육체를 입음"을 뜻합니다. 죄인을 구원하고 그 대속물이 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드님은 겸손히 자기를 낮추셔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사랑을 받은 사도 요한은 우리가 믿는 숭고한 가르침을 자신이 기록한 복음서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너무나도 엄청난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도 장차 오실 자가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신 분으로 나와있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느 날 한 구원자, 왕,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셔야 했지만 그분은 또한 약속도 주셔서 "여자의 후손"(이것 자체만으로도 최소한 동정녀 탄생을 암시하고 있음)이 원수를 파하리라고 하셨습니다(창3:15). 구원자는 사람인 어머니에게서 사람으로 나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22:18에서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을 가져다 줄 구원자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 중 한 사람이 되리란 것이었습니다. 이 약속은 이삭에게도 전수되었고(창26:4), 야곱에게도 전해졌습니다(창28:14). 하나님은 유다에게 약속하셔서 왕이 그의 지파에서 나실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창49:10). 다른 약속들을 통해 오실 자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일 것이며(신18:15), 멜기세덱과 같은 제사장이며(시110:4), 다윗의 혈통에서 난 왕(삼하7:16)일 것이라고 증거 되었습니다. 이런 구절들과 다른 많은 구절들로부터 우리는 오실 구원자는 천사나 무슨 다른 존재가 아니라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편 다른 많은 약속들에서는 분명히 밝히기를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사25:9). 세례(침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고 광야에 우리 하나님을 위해 대로를 평탄케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사40:3, 요1:23 비교). 말라기는 예언하기를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라"고 했습니다(말3:1). 이사야는 장차 오실 왕의 이름을 몇 가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사9:6,7). 메시야의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이며 이 이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동정녀에게서 나시도록 되어 있었습니다(사7:14, 마1:23 비교).
어떻게 해서 약속하신 왕과 구세주께서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 되실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 대한 신약성경의 답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육신입니다. 마태복음1장과 누가복음3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읽게 됩니다. 바울의 서신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한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롬9:5).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15:47). "그는 육신으로 나타내신 바 되시고"(딤전3:16). 우리는 갈라디아서4:4, 빌립보서2:6-8, 그리고 히브리서2:14 같은 구절들도 읽고 주의 깊게 상고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아드님은 원하시면 사람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주 예수님의 사랑은 그분이 사람이 되고자 원하셨음을 우리에게 말씀해줍니다. 또한 그분의 전능하심은 그분이 그렇게 하실 수 있음을 우리에게 말씀해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을 때 이제 그분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은 전혀 있을 수도 없으며 믿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셨을 때 그분이 자신의 속성 중 일부를 버리셔야 했다는 것을 우리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케노시스(Kenosis)이론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셨다"는 빌립보서2:7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이론은 그리스도께서 외적으로 드러난 그분의 영광과, 자기 속성을 독립적으로 쓰실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셨으며, 마땅히 경배 받으실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셨다는 이론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그리스도께서 존재하시는 한 지니고 계신 본질의 일부이지, 없어지거나 하는 권세나 능력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전능하지도 않고 전지하지도 않은 하나님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이미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계실 때 자기 육신의 필요를 채우고자 자신의 신적인 능력을 사용치 않으셨습니다. 그때 그분은 인성과 신성을 지니셨지만 오직 한 분이신 인격체이셨습니다. 유한한 인간의 지성은 신인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점 때문에 놀라서는 안되겠습니다. 이 심오한 주제에 대해 생각할 때 기억해야 될 좋은 원칙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갈라놓지도 말고 신성과 인성을 모호하게 흐려놓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경외심으로 감동시킬 영광스러운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우편에 영광 중에 계신 한 사람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대제사장이시며, 인간으로서 이 죄악된 세상을 살아나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또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오해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계신 분입니다. 우리와 같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이보다 더 격려가 되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창골산로.jpg 기독론(基督論:CHRISTOLOGY) 그리스도 (2)

   
작성자:R.E 할로우
   
그리스도의 이름들

그리스도의 호칭과 이름들에 대한 주제를 다루자면 많은 지면을 할애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한 성자의 지위를 나타내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인자"는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을 대표하시는 참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오늘날의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성경 전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 호칭, 예표 등을 성구별로 공부하는 것은 참 가치 있습니다. 지면 사정상 우리 주님의 이름 중 가장 뛰어나고 또 가장 흔히 쓰이는 것 세 가지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그분은 주님이라고 불립니다. 이 이름은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주이신 구약성경의 여호와(흠정역에서는 "주"로 표기함)이심을 입증합니다. 이 이름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권세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 이름을 입버릇처럼 함부로 사용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주재권에 순복할 뜻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요13:13, 눅6:46).

두 번째로 그분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주(또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또는 "구원의 주" 라는 뜻을 가진 이 이름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서 가지셨던 이름이며 그분이 구원자이심을 강조해줍니다. 알려진 통념과는 정 반대로, 이 이름은 그리스도 당시에 유대 남자들에게 흔히 지어주는 이름이었습니다(헬라어인 "예수"는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 이 이름은 복음서에는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서신서에서는 "주"나 "그리스도"와 같은 호칭 없이 단독으로는 자주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 어떤 이들은 "주 예수님" 이나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그분을 높여드리는 호칭도 없이 그저 예수라는 이름만을 너무도 자주 씁니다. 찬송가에서도 "예수"라는 이름만 허전하게 씌어 있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사도 바울이 그 서신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그분의 이름과 호칭을 다 갖추어 불리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세 번째로 그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이름은 단순히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호칭인 "메시야"에 해당하는 신약의 헬라어일 따름이며 그 뜻은 "기름부음 받은 자"(행4:26과 시2:1,2 비교)입니다. 이 이름은 주님이 다윗의 혈통이실 뿐 아니라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가지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이름을 쓰는 많은 사람들은 그저 이 이름이 무슨 "성(姓)"인 줄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함으로써 실상은 나사렛 예수께서 참 메시야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대신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을 쓸 때는 그분의 인성보다 그분의 직분을 더 강조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생애

여기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한 생애의 중요한 부분만 가장 짧게 쓸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복음서조차도 나사렛 예수의 전 생애에 대한 일대기라기보다는 그분의 행적과 말씀의 일부만 정선해 기록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분의 탄생과 소년기를 먼저 이야기해야 될 것입니다(마1:18-25, 눅2:1-10, 41-52). 하나님께서 동정녀 탄생이라는 기적을 통해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답고 합당한 일입니까! 처녀의 태 속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으로 예수님께서 잉태되셨고 완전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물론 모든 인간이 물려받은 원죄가 조금도 없는 분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은 땅 위에서 약 삼십 삼 년을 사셨습니다. 아기 적부터 삼십 세쯤 되실 때까지는 주 예수님께서 부모에게 순종하신 아들이었고 또 자기 천부에 대한 것에 관심을 가지셨던 완전한 소년이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 단 한번 언급되었을 뿐입니다(눅2:41-52). 복음서의 기록 대부분은 삼 년 남짓 되는 그분의 공생애에 대한 것이며 특별히 십자가에 달리신 주간(흔히들 "고난주간"이라 부름)에 대한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한 주간에 대한 기록은 복음서 전체에서 같은 기간의 기록으로서는 단연코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 받았습니다.

주님은 침례를 받으셨습니다(마3:13-17, 막1:9-11, 눅3:21,22). 메시야로서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이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들(왕상19:16), 제사장들(출28:41) 그리고 왕들(삼하2:4)은 모두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각자의 특별한 사역을 위해 구별되었습니다.
삼십 세쯤 되어서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사촌인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요한은 누구에게든 침례를 주기 전 그 사람더러 회개하라고 항상 힘주어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실 죄가 전혀 없으셨지만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이는 당시 경건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모두 침례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도 이 사람들과 같은 사람으로 여겨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마3:15). 아무도 예수님이 자기 죄를 자백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즉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예수님을 일컬었습니다. 더욱이 성령님은 비둘기 같이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셨습니다(요3:34). 구약에서 기름을 붓는 것은 신약에서의 성령님을 상징하는 그림입니다. 침례 받으시던 날 성령님께서 이와 같이 특별한 방법으로 예수님께 임했을 때,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기름부음 받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마4:1-11, 눅4:1-13). 하나님은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사람이 되신 주님을 친히 인정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단은 즉각 여기에 도전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께서 사람의 상태로 계시려면 다른 사람들처럼 반드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썼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결코 하나님을 거스려 죄를 범치 아니하시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지만 사단은 온갖 악한 술책을 써서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계획을 무산시키려 애썼습니다. 사단은 실패했고 예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혀 죄를 짓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주님이 시험을 받으신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 고소하는 자가 기회를 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욥의 경우에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욥1:9-11). 아마 사단은 "모든 사람은 죄를 짓습니다. 예수도 죄를 지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② 예수님은 성령님의 이끌림을 받아 광야로 가셔서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마4:1). 하나님께서 아드님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을 온 우주에 드러내시는 데에 친히 동의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는 죄를 지으실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유혹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는 사단의 유혹에 응할 만한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흠 없으심을 부인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또 "주님은 죄를 지으실 수도 있었지만 짓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분은 엄청난 압박을 받으시는 가운데 자기가 죄 없으심을 증명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죄를 지으실 수 없었지만 사람으로서는 죄를 지으실 수도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 두 가지를 가지셨는데, 이 두 의지는 피차간에 반대로 작용했을 수도 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 말은 결국 그리스도께서 이중 인격을 가지셨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단지 한 인간에게 "임하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이단적 교리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땅에 계실 때 죄를 지으실 수 있었다면, 그분이 현재나 장래에 타락하실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죄를 지으실 가능성을 언제쯤 잃게 되셨다는 것입니까? 유혹을 이기긴 하지만 언제든 넘어질 가능성이 있는 사람보다는, 언제나 변함없이 완전하신 구주가 계심(히13:8)을 아는 것이 더 없는 확신을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처럼 불완전한 인간의 예는 성경에 많습니다. 성경은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을 가르치고 있으므로, 인간적인 추리는 다만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결론에 이를 뿐입니다.

주님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이적들 가운데는 생명체가 아닌 다른 대상에게 행하신 것이 있었는데, 예를 들자면 광풍을 잠잠케 하신 일이 있겠습니다. 또 생명체에 대한 이적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물고기를 기적적으로 잡으신 일 같은 것입니다. 특별히 인간에 대한 이적으로는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 등이 있습니다. 영적인 이적으로는 귀신을 쫓아내신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더 듣기 좋게 만들 목적으로 예수님은 자석처럼 사람을 끌어당기는 인품을 지니셨다든지, 그분이 함께 계시기만 해도 사람들의 몸이 한결 나아지곤 했다는 등의 말을 하곤 했습니다! 이 말이 주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광풍을 잠잠케 하신 일에도 적용되는 것인지 이러한 추론을 어떻게 보아야할지 어렵습니다! 흔히 있는 일입니다만, 이른바 "비신화화(非神話化)"라고 하는 즉, "성경의 기적적인 요소를 제거하려고 애쓰는 이론대로 성경을 설명하는 것"은, 성경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보다 더 믿기 힘든 법입니다. 그리스도는 이적을 행하셨으며 이는 그가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또 돕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또 이적을 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심을 증거 하셨습니다(행10:38). 그분이 행하신 이적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분께 마음이 끌렸으며, 이 사람들이 자기 앞에 나왔을 때 주님은 하나님에 대해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적은 또한 믿지 않는 자들로 변명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요15:24).
마지막으로 주님은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어떤 책도 쓰시지 않으셨습니다만 그분의 가르침은 우리를 위해 사복음서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많은 부분과 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많은 부분에 우리 주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에 대해 가르치셨을까요?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또 하늘나라에 대해, 그리고 당신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 재림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단순하게 복음을 전하셨지만, 종종 더 깊은 진리들을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미래에 관한 것과 그분의 추종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특별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와 거기에 담긴 더 깊은 의미들은 바울의 서신에서 발견하게 되며 또한 구원론 편에서 상고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과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에 대한 역사적 측면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푸셨는데 왜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배척했을까요? 우선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은 영광 중에 오셔서 자기들을 로마의 통치에서 구원해 줄 왕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히 오셔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막10:45). 다시 오실 때, 주님은 영광 중에서 우리들을 다스리게 되십니다만, 먼저 그분이 고난받으시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와 믿지 않음을 꾸짖으셨으며 특별히 종교지도자들의 외식을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을 선동하여 그리스도를 대적하게 하고 그분의 죽음을 요구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일차 "재판"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모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열렸습니다. 이 기구는 예수께서 자기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시기 때문에 그분을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그중 어떤 사람들에게도 죽일 권세가 없었기 때문에, 로마사람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로 예수님을 넘겼습니다. 빌라도는 이내 예수님께서 사형 받을 만한 아무 일을 하신 것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만, 백성들을 달래고 자기 관직을 잃지 않기 위해 그들의 바라는 것에 동의하고 예수님을 정죄하여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친구들은 그를 버렸고 유대인들은 그를 비웃었고 군병들은 그분을 괴롭혔습니다. 그분의 깊디 깊은 슬픔은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을 때 극에 달했습니다. 그런 뒤 주님은 큰 소리로, "다 이루었다!"하시고, 영혼이 떠나가셨습니다. 인간의 죄는 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데서 명백히 드러났습니다만, 궁극적으로는 어느 인간도 그분에게서 목숨을 빼앗지는 못했습니다(요10:17-18, 행2:23). 그러면 왜 하나님은 주님을 버리셨을까요? 여기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한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후5:21).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받으셨다는 증거는 친히 주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데서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가지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다는 것은, 고대사에 확실히 입증이 된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몸을 세마포로 싸서 동양의 관습대로 동굴에 장사했습니다. 빌라도와 유대인들은 그 무덤을 지키도록 보초를 세웠습니다. 혹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갈까봐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초를 세웠어도 안식 후 첫날(일요일) 동굴을 보니 문은 열려 있고 안은 텅 비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다시 살아나신 모습으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 베드로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예루살렘의 열 제자, 도마, 또 오백 명의 형제들 앞에 동시에 나타나셨으며, 야고보와 갈릴리의 일곱 제자, 모든 사도들에게, 또 다메섹 근처에서 사울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요20:16,26, 눅24:10,36, 고전15:5-8).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은 영광스럽게 된 상태였으나, 사실 죽으시기 전의 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상처도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잡수시고 얘기도 나누셨으며 제자들에게 아직도 자기가 누군지 의심이 들거든 자기 몸을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또 한편, 주님은 원하시면 사람들의 눈에 안 보이실 수도 있었으며 닫힌 문도 통과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시기 전엔 이런 능력을 결코 쓰신 적이 없었습니다. 부활은 사도행전의 설교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대로 우리 믿음의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아무리 강조한들 지나치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승천과 현재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심

주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신 후 사십 일 동안 몇 차례에 걸쳐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구약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더 설명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온 천하에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님은 항상 그들과 함께 할 것이며 며칠이 못되어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뒤 주님은 몸을 지니신 그대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행1:3-9). 주님은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가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것입니다(요16:28). 주님은 사람의 모양을 입으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며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빌2:6-11). 하나님은 또 아드님을 하늘의 자기 우편에 앉히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셨습니다(엡1:20-22).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셨을 때 큰 소리로,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운명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사역을 믿는 것은 죄인을 위해 가치가 있습니다. 만일 죄인이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영원토록,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의 선행을 의지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또 그리스도께서 아직 이루어 놓지 않은 일에 대해도 아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영원히 끝났습니다만, 그분은 오늘도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신약성경은 주님께서 현재도 이렇게 일하고 계시는 것을 다섯 단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들 중 세 단어는 그리스도와, 그분이 하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 사역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두 단어는 그리스도와 믿는 자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중보자이십니다(딤전2:5). 욥은 고난 중에 누군가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서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욥9:33). 그리스도는 이상적인 중보자 혹은 "중재자"이십니다. 그분은 인성과 신성을 둘 다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이면서 사람인 분도 한 분이시며, 중보도 한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다른 중보자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중보를 서줄 분은 더더욱 필요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이시며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또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율법은 모세를 중보자로 해서 천사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갈3:19). 그리스도는 은혜의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 그분은 더 나은 언약의 중보이십니다(히8:6). 또 그분은 시간적으로 새 언약의 중보이십니다(히9:15). 그리고 그분은 질적으로 새 언약의 중보이십니다(히12:24).
우리는 이 새롭고도 더 나은 언약이 주는 유익을 은혜로 얻게 됩니다. 중보자로서 그리스도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제사장이십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 반열의 우두머리는 두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곧 아론과 멜기세덱이었습니다. 신약에서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시며 아론 지파의 제사장직을 완성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아론과 멜기세덱보다 더 뛰어나십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영원히 대제사장이십니다. 큰 대제사장이라고 불리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히4:14,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한 언급은 오직 히브리서에만 나옵니다). 대제사장이 행하는 주된 의무는 예배와 중보에 관련되어 있습니다(히5:1,2).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온전한 제물로 드리셨습니다(히10:12).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예배를 인도하시며 우리의 찬양을 하나님이 받으심직하게 만드시는 일을 하십니다(히10:19-22). 제사장으로서 주님은 영원히 살아 계셔서 중보의 일을 하시며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히7:25).
옛날 대제사장 아론은 어깨와 가슴에 보석이 달린 거룩한 옷을 입었습니다. 이 보석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위해 기도해주시며 이들로 계속 복을 받게끔 지켜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언자이십니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나오게 하십니다.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이 계속 복받는 자리에 있도록 지켜주십니다. 한데 우리가 만일 죄를 범한다면 대언자되신 그리스도가 또한 필요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 이 구절로부터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전혀 죄짓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사실상 죄가 없다거나 완전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범죄할 때,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언자로 예비해놓으셨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변호사나 상담가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려고 애쓰는 것과 똑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범죄한 신자를 돌이켜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시 회복하게끔 하는 일을 행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는 자가 죄를 범하면 영생을 잃는다는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또 아버지의 간섭 없이 죄를 계속 지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역시 비성경적입니다. 한편 대변자라는 낱말은 성령과 같은 단어로 쓰이며, 요14:16,26, 15:26, 16:7에서는 보혜사로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이점은 그리스도께서 현재 하시는 일에 대해 한 가지 의미를 더해줍니다. 이것은 또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과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 긴밀히 연관되어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대언자의 역할을 하시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사단은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로 불리고 있습니다(계12:10). 이것 외에 사단이 하는 일들은 천사론에서 더 상고하게 될 것입니다.
벧전2:25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두 가지 호칭이 더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믿는 자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그리스도의 현재 진행중인 사역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그분은 우리의 목자라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셨습니다(요10:11). 이것은 이미 과거의 일입니다. 큰 목자이신 주님은 지금 우리 속에서 역사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선한 일에 완전하도록 만들고 계십니다(히13:20,21). 목자가 하는 일은 양을 먹이고, 인도하며,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곧 목자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나타나셔서 자기를 충성스럽게 섬긴 사람들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벧전5:4).
두번째로 주님은 우리의 감독이십니다. 이 말의 뜻은 "감찰자"며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 개인과 교회의 보호자 또는 관리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주님으로서 믿는 자들이 자기에게 헌신적인 봉사를 하도록 요구하실 권리가 있습니다. 주님은 무관심한 자들을 일하도록 부르십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주님은 일곱 교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 아시는 분으로 나오십니다. 주님은 충성되게 섬긴 것에 대해 바로 지금도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시며 또 자신의 심판대에서는 그보다 더 큰 상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반면에 주님은 배도한 교회가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곧 그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계2:5).

그리스도의 재림과 영광

우리는 앞에서 구약이 장차 오실 메시야를 약속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메시야는 곧 선지자요, 제사장이며, 또 동시에 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계셨을 때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주셨습니다(히1:1,2). 지금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주님은 왕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신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분에 대한 어떤 기록도 결코 완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먼저 겸손히 이 땅에 오셔서 인간에게 버림받으시고 욕을 받으시며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주님을 하늘, 곧 우주 가운데서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버림받으셨던 바로 여기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존귀를 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의 핵심 부분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모든 무릎이 그분 앞에 꿇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왕이라고 부를 때는 교회보다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며, 교회에 대해서 주님은 신랑이 되십니다. 신구약의 관련구절들을 모아보면 우리는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배우게 됩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구름 가운데 오셔서 사랑하시는 교회를 자기에게로 맞아들이십니다. 이 일 후에 그리스도의 심판과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있게 됩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처음엔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발전"과 번영이 있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진노가 부어질 때 모든 것이 대환난으로 변하고 맙니다. 그 뒤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능력으로 임하셔서 이 땅에 나타나시게 됩니다. 그분은 자기를 참으로 믿는 자들을 배척하는 자들로부터 분리하실 것입니다. 주님을 배척한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되지만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전례 없는 복된 기간 동안 이 세상에 다시 살게 됩니다. 이 기간은 천년 동안 지속되며 이것을 가리켜 "천년왕국"이라고 부릅니다. 이 기간 중에 사단은 갇혀 있게 되지만, 천년이 끝날 무렵 잠시 동안 다시 놓이게 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통치를 무산시키겠다는 일념으로 반역하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일으킨 전쟁은 반란군 전원의 멸망으로 끝나게 되며, 그뒤 이들은 크고 흰 보좌의 심판에서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이 받는 심판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일 후에 하늘과 땅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게 됩니다(살전4:13-17, 계20장,21장).

이상과 같은 짧은 공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장래 계획이 바로 그분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장래의 일에 대한 이런 주제들은 뒤에 나오는 종말론 편에서 관련 성경구절과 더불어 자세히 상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사는 우리로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놀랍게 예비하신 것과 우리 앞에 놓인 영광스런 장래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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