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농업은 급격한 변화를 맞고 있다. 개방이라는 대세 앞에서 우리 농업인들은 세계 각국의 농산물과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해졌다. 이제 보조적 역할에 머물던 여성농업인들은 남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새로운 성공신화를 쓰고 있다. 또 결혼이민자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농촌 사회의 새로운 문화도 만들어 가고 있다. 국정브리핑과 농림부는 모두 15회에 걸쳐 △개방에 맞서 차별화된 우수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는 농업인 △특유의 섬세함으로 독자적 영역을 구축한 여성농업인 △우리 땅에 뿌리내려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결혼이민자들을 만나 우리 농업의 희망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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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산무역 조기심 대표 |
파프리카가 국내에서 대량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1995년. 농산무역의 조기심 대표는 이때부터 동생인 조인기씨와 함께 유리온실에서 본격적으로 파프리카를 재배하면서 국내 파프리카 재배의 역사를 열었다.
파프리카와 만남, 그리고 열정적 노력
의류 유통업에 종사한 경력의 조 대표. 그리고 환경 제어를 통해 고품질 농산물 생산 가능성에 확신을 갖고 있는 동생 조인기 씨. 그들에게 농업에서의 첫 도전은 과연 어떤 작물을 선택하는가였다.
일 때문에 일본을 자주 드나들던 조 대표는 우연히 일본 시장에서 파프리카를 만났다. 알록달록 고운 색채, 달면서도 지나치게 달지 않은 상큼한 맛, 아삭거리는 깔끔한 식감, 매운 듯 맵지 않은 독특하고 풋풋한 향. 이거다 싶었다.
당시 일본 파프리카 시장은 네덜란드산이 독점했다.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깝다는 점을 이용해 신선도를 높일 수 있다면 일본 수출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1995년 조씨는 파프리카를 재배하기로 결심하고 네덜란드의 재배 기술자를 꽤 비싼 연봉을 주고 초빙했다. 그에게 1년간 기술 전수를 받았다. 국내 처음으로 파프리카 재배를 성공시킬 수 있는 노하우를 얻은 것이다.
1996년 드디어 일본 수출에 성공한다. 혼자서 직접 경매시장을 돌아다니며 발로 뛴 결과였다. 일본 출장을 가면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자정이 돼야 호텔로 돌아오는 생활을 했다. 천신만고 끝에 조씨의 국산 파프리카는 일본 시장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조씨가 일본 수출로 활로를 만든 지 벌써 10년. 이제는 국내에서도 파프리카는 꽤 흔한 상품이 됐다. 농산무역의 매출은 2005년 140억원에 달하며 그 가운데 일본 수출이 80%, 내수가 20% 정도다.
품질 관리가 생명
“지난해 국산 파프리카 수출액이 5000만달러였지만 제가 보기에는 1억달러도 가능합니다. 일본에는 아직 치고 들어갈 수 있는 시장이 많아요. 지금도 물건을 달라는 곳이 많거든요. 문제는 품질입니다. 네덜란드나 뉴질랜드에 비교해서 한국산 파프리카가 품질이 떨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몇 년 사이 파프리카 생산 농가는 급격히 증가했지만 시설이 열악한 곳이 많아서 품질이나 식품 안전성을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파프리카는 품질 관리가 매우 까다로운 작물이다. 바이러스에도 약하고 착과 후 충분한 영양이 있어야만 열매가 열린다. 생육 초기부터 영양 상태가 좋아야 하고, 빛·온도·습도·이산화탄소의 양 등 모든 환경이 딱 맞아 떨어지고 지속적으로 관리를 해줘야 제대로 된 열매를 맺는다.
가지를 정리하거나 수확하는 등 작업시기도 정기적으로 정확하게 맞춰야 한다. 작업시기가 조금만 늦어도 생산량이 줄어든다. 또 겨울에는 재배에 필요한 절대 빛의 양이 부족하기 때문에 유리를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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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화된 작업장에서 파프리카가 선별 출하되는 모습 |
현재 농산무역의 전산 시스템은 박스 포장 단위로 바코드 처리돼 있어 농산물의 이력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 일본과 국내의 구매자는 생산농가와 농산물 이력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식품 안전성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다. 또한 농가는 내 물건이 어디로 가서 팔리는지 파악할 수 있어 고품질 관리가 가능하고 경영 투명성 확보와 소속 농가와의 신뢰도 강화할 수 있다.
함께 가자, 희망으로
“농사만 짓고, 중간 업체에게 물건을 넘겨버리면 편하죠. 하지만 시장 상황을 알기는 힘들어요. 소비자를 모르고 시장을 모르면 중간 유통업자들한테 속거나 휘둘리기 쉽지요”
그렇게 관리해서는 지속적이고 성공적인 수출을 할 수가 없다. 큰 비전도 없다. 조씨는 농가를 설득했다. 농가 의식 수준을 바꾸는 것이 중요했다.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어이 1999년 파프리카를 재배·수출하는 전국 시설온실 농가를 설득하고 협의한 끝에 농산무역을 설립했다.
“제가 혼자 파프리카 무역회사를 차렸다면 돈은 많이 벌었을 겁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재배 농가의 힘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좀 고생스럽더라도 같이 가야 미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조 대표는 설립 3년 만에 처음으로 회사에서 연봉 3000만원을 받았다. 3년 동안 무료 자원봉사를 한 셈이다.
일본 시장 개척은 순조로웠다. 생산물의 대부분이 일본으로 수출되다 보니 수출 다각화가 절실해졌다. 일본 다음에는 대만으로 진출했고, 앞으로 미국·중국 등 더 큰 시장에 진출할 예정이다. 지금도 조씨의 눈은 계속 새로운 세계 시장을 향한다.
큰 시장을 보려면 길게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에 이어 대만·동남아 등으로의 판로를 개척을 검토해 온 조 대표가 현재 가장 중요한 시장으로 판단한 곳은 중국이다. 가격이 싸고 투자보다 인건비 경쟁이 일어나는 노지 재배 쪽은 이미 중국이 경쟁력에서 앞서 있다. 중국 시장을 공략하는 데는 고품질 농산물이 답이다.
뭉쳐야 산다
일본 시장에 진출한 이후에도 국내 시장만 보고 있던 농가를 설득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농산무역은 파프리카 생산농가를 설득해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초기에 이미 규모화를 이뤄냈다. 농업에 있어서도 규모화는 유통·판매에서의 교섭력을 키우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농산무역은 생산자 단체가 공동 출자해 주주로 참여하고 있는 주식회사다. 현재 농산무역의 주주 농가는 72개지만, 직접적으로 회사와 관계를 맺고 있는 곳은 이들 농가가 가입되어 있는 영농조합법인 및 시설온실 19개소이다.
농산무역은 일본에 있는 최종 바이어와 직거래를 할 수 있을 만큼의 물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해 주는 규모화를 이루었다. 농산무역은 규모화를 통해 시장에서의 교섭력을 확보함은 물론, 고품질 상품 생산에 필요한 투자 기반을 확립해 나갔다.
농산무역은 파프리카라는 돛을 달고 넓은 바다를 해야 더 멀리 나아가고 있다.
출처 : 우리농(농림부 블로그)
글쓴이 : 새농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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